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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임진왜란의 역사2) 조선 최고의 영웅이 패배하다. (신립과 이일장군)

by 히스토리초이 2023.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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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조선은 막지 못하였는가

 

동래성 함락이후 일본은 물밀듯이 북쪽으로 향해 달렸습니다.

밀양, 김해, 청도 등은 맞써 저항하였으나 결국엔 패하고 맙니다. 왜군의 제1군은 동래-양산-청도-대구-선산-상주로 향하였으며 2군은 동래-언양-울산-경주-영천-군위-충주로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3군은 김해-성주-추풍령-청주-경기도로 향하였습니다. 

 

이런 와중 조정에서는 삼포왜란과 같이 왜구들이 해안가에서만 행패를 부리는 수준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일장군을 남으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하였습니다. 

우선, 조선의 가장 큰 잘못은 대응방법이 잘못되었던 점입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응방법 자체가 너무나도 단순하였습니다. 

 

장군 한명을 달랑보내는 체제가 도저히 말도 안됩니다. 그 당시 조선은 제승방략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제승방략 체제는 16세기 잦은 왜변으로 인하여 방어전략을 제승방략으로 유지를 하였습니다. 제승방략 체제라고 하면 여러지역의 병력을 통합해 방어하는 체계입니다. 

 

기존에는 각 지역을 수호를 하면서 인근에 적이 나타나면 다같이 집결하고, 중앙에서 파견한 지휘관의 지시를 따르는 체제입니다. 

물론 임진왜란 같은 경우에는 제승방략 체제가 매우 효과적이지만, 진군속도가 너무 빨라 지휘관이 도착하기도 전에 군이 궤멸되는 경우가 너무 많이 나타났습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하였고, 부산진성 함락이 4월 14일, 동래 함락 4월 15일, 조정 보고일은 4월 17일이였습니다. 물로 시대적인 배경도 있었겠지만, 대응 자체가 너무 느렸던 것이 조선의 한계였던것 같습니다.

 

2. 신립과 이일장군의 패배

 

당시 조선의 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신립과 이일장군이 있었습니다. 

우선 이일 장군은 상주에서 왜군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빠른 왜군의 진격속도에 4월 25일에 상주앞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일이 상주에 도착하였을때는 조선군은 이미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고, 상주 목사도 이미 도망간 상황이였습니다. 억지로 이일 장군은 병력을 긁어모아 기초적인 군사훈련만 진행한 상태에서 왜군을 맞이하였고 결국엔 너무나도 쉽게 패배하게 됩니다. 한편 이일장군은 갑옷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일 장군은 신립 장군이 있는 탄금대로 가게 되었고, 함께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4월 28일 탄금대 전투를 맞이하게 됩니다. 신립장군과 고니시의 대결이기도 하였고, 기병과 보병의 싸움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선의 군이 큰 규모로 모여 싸우는 전쟁이였기에 조정에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당시 조선의 주력은 기마병이였고 일본은 조총병이였습니다. 정확한 군사의 수는 기록마다 다르기에 추측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데, 조선군은 1만명 정도였으면 일본군은 1만8천여명으로 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신립 장군은 기병으로 구성된 부대이다 보니, 평지인 곳을 선택했는데 이러한 선택이 패착의 원인이 되어버립니다. 많은 장군들이 문경새재에서 막아야 된다고 이야기를 하였지만, 신립 장군은 탄금대 평야를 고집하였습니다.

 

문경새재부터 충주까지는 지금 가도 산새가 험하고 천혜의 요새 같은 느낌이 납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겠지만 만약에 평야보다 이러한 곳에서 전투를 했으면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궁금합니다.

 

다들 아시다 시피 탄금대 전투는 조선군의 패배로 끝나게 됩니다. 신립은 결사 항전을 하였지만 패배하게 되고 자결합니다. 

신립의 죽음으로 조선은 충격과 공포를 맛보게 되었고 일본군은 더욱더 사기가 높아져 침략을 더욱 감행하게 됩니다. 신립 장군의 패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이러한 모든것은 조선의 안일한 방어 시스템 때문이였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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